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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역사와 문화

태조왕건과 연관된 대구 지명 유래


 

 

왕산(王山)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고려 태조 왕건의 군사(927년)가 나팔고개를 지나 맞붙게 되었는데, 고려군은 견훤의 군사에게 무참히 짓밟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 때 고려 충신 신숭겸이 왕건을 살리기 위해 옷을 바꿔 입고 왕건의 모습으로 꾸며 적군의 눈을 속였다. 이 틈을 타서 왕건은 지묘1동 북쪽
에 있는 산으로 무사히 피신을 해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 산이 왕건을 살렸다는 뜻에서 왕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왕산 앞에
왕건 대신 죽은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가 현재 위치하고 있다.

 

 

불로동, 반야월, 안심
이 지역에는 이외에도 왕건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지명으로 남아있다. 왕건이 도주하다 왕을 잃어버렸다는 시량리, 도주 중 날은 반야이고, 중천에 달이 떠 있어 탈출로를 비췄다고 해서 반야월. 이 지역에 도달하여 안심했다는 안심 등의 유래가 있다.

그 외 왕건이 숨어 정세를 살폈다는 은적사. 편안히 쉬어간 곳이라 하여 안일사, 또한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는 무태 등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나팔고개
서기 927년 신라가 후백제를 기습하기 위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원군을 요청해 왕건이 기병 5천을 데리고 왔지만 연전연패 당한다. 최후로 포위된 곳이 지묘동이다. 전쟁 당시 지묘를 중심으로 견훤의 군사들이 포위망을 압축시키기 위해 나팔을 불었다고 해서 나팔고개가 되었다는 전설과, 왕건의 군사들이 무태로부터 6km를 긴장하며 행군하다가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나팔을 불어서 나팔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속칭 나발고개라고도 불린다.

 


독좌암

왕산 기슭의 봉무정 앞에는 큼직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는 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지묘동 동남쪽으로 도주하다가 봉무토성 앞 바위 위
에 홀로 앉아 쉬었다고 해서독좌암( )이라 부른다.

 

 

파군재
후백제 견훤과의 공산 싸움에서 대패한 고려군은 태조 왕건을 피신시키고 신숭겸 장군을 중심으로 끝까지 항거하였다.
이때 고려군은 지묘2동에서 파계사로 넘어가는 뒷산을 뚫고 위장전술을 폈으나 역부족 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군사를 수습하여 오른쪽 동화사 고갯길로 활로를 개척하여 지묘 앞 냇물을 간신히 건넜다.
이런 연유로 신숭겸 장군의 군사가 1차로 파해서 흩어진 곳을 아랫 파군재 2차로 파한 곳을 윗 파군재로 부르게 되었다.